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벤저민 디즈레일리 (문단 편집) === 1기 내각 (1868) === || [[파일:Benjamin Disraeli Old.jpg|width=300]] || || 총리 시절의 디즈레일리 || 1868년 2월 야심차게 출범한 디즈레일리 내각은 '''불과 10개월만에 붕괴한다.''' 그가 초선 의원일 때부터 거진 20년 넘게 실행을 주장한 보통선거가 1867년 제3차 선거법 개정[* 3차 개정을 통해 도시의 소시민과 도시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. 이는 부르주아가 아닌 계급에게 영국이 투표권을 준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. 물론 남성에게만 한정된 것이었다.] 을 통해 이 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. 아이러니컬하게도 선거 결과 글래드스턴이 이끄는 [[자유당]]이 다수 의석을 차지한 것.(...) 이 10개월 남짓한 시기에 디즈레일리 내각이 마주해야했던 문제는 주로 [[아일랜드]]의 [[종교]] 문제였다. [[가톨릭]] 교도가 다수인 아일랜드를 식민지로 삼은 이후 영국은 가톨릭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일부러 국교회([[성공회]])를 비롯한 개신교를 지원해줬는데, 문제는 이 지원이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졌다는 것. 가톨릭교도들의 분노는 이 시기 드높았고, 디즈레일리는 국비로 아일랜드에 가톨릭 [[대학]]을 건립하는 것으로 적당히 타협을 보려했지만, [[자유주의]]자 글래드스턴과 그가 이끄는 자유당은 [[정교분리]]를 신봉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러한 디즈레일리의 제안에 대해 거세게 반대했다.[* 풀어 말하자면 글래드스턴은 가톨릭과 성공회 둘 다 국가가 신경쓰지 말고 그냥 알아서 내버려둬라 라는 입장인 셈.] 자유당이 글래드스턴의 입장으로 대동단결한 반면, 여당은 디즈레일리의 정책을 놓고 분열이 있었기 때문에 이 종교 문제는 디즈레일리 내각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만 초래했다. 반면 자유당은 "비국교회"가 강력한 정체성이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